티스토리 뷰

책 읽고도 남는 게 없다고 느끼던 나에게,

 

 

퇴근하고 책상에 앉아 열심히 책장을 넘겼는데, 며칠 뒤에 그 책 내용을 물으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잖아. 매일 독서하는 습관까지 잡아놓고 '내가 책을 읽긴 읽은 건가' 싶었지.

그런데 답은 읽기가 아니고 쓰기 쪽에 있었어. 손으로 글씨를 쓸 때는 타이핑할 때와 달리 기억과 감각, 운동을 잇는 뇌 영역들의 연결성이 폭넓게 증가한다는 연구가 있어. 눈으로만 읽던 독서법에 손글씨와 필사를 붙여본 이야기를 적어볼게.

돌아보면 독서를 성적표처럼 대하고 있었어. 한 달에 몇 권, 1년에 몇 권이라는 숫자는 쌓이는데 정작 그 책에서 뭘 느꼈고 삶에 뭐가 남았는지는 돌아본 적이 없었지. 읽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고 다음 페이지로, 다음 책으로 넘어가기 바빴던 거야.

눈으로 훑는 독서가 왜 쉽게 증발하는지는 필기 연구에서 힌트를 얻었어. 노트북으로 강의를 받아 적은 학생들은 들리는 대로 그대로 옮기는 경향이 강해서 내용을 소화하는 과정 없이 손가락만 움직였고, 손으로 적은 학생들은 속도가 느린 탓에 어쩔 수 없이 요약하고 자기 말로 바꾸면서 개념 이해 문제에서 더 좋은 성적을 냈다는 실험이 있어(출처: Psychological Science(PubMed)). 그 독서가 딱 노트북 필기 같았어. 문장이 눈을 통과해 지나가기만 하고 자기 언어로 바꾸는 정거장이 없었던 거지. 타이핑으로 메모하는 게 소용없다는 뜻이냐고 묻는다면, 소용이 없지는 않고 긴 정리는 지금도 키보드로 해. 다만 뇌 활성과 연결성에서 차이가 난다는 게 측정으로 확인됐고, 타이핑은 그대로 받아치기 쉬워서 요약이라는 소화 과정을 건너뛰게 돼. 기억에 남기고 싶은 문장만큼은 손으로 쓰기로 했어.

 

손으로 쓰는 순간 뇌에서 벌어지는 일은 측정으로도 확인돼 있어. 대학생들에게 같은 문장을 손글씨로 쓰게 하고 타이핑도 하게 한 뒤 뇌 활성을 비교한 실험에서, 손글씨를 쓸 때 좌측 전전두피질이 더 크게 활성화됐어. 이마 바로 뒤에 있는 전두엽의 앞부분으로 주의집중과 단기 기억, 계획 세우기를 담당하는 사령탑 같은 영역이야. 다음에 쓸 내용을 떠올리고 글자 크기와 공간 배치까지 계획해야 하는 손글씨와 달리, 타이핑은 배치를 컴퓨터가 대신해주니 뇌가 그만큼 덜 일하는 셈이지.

노르웨이 과학기술대 연구팀이 대학생 36명의 뇌파를 256채널 장비로 기록한 연구에서도 손글씨를 쓸 때만 기억, 감각 처리, 운동을 잇는 뇌 영역 간 연결성이 폭넓게 증가했어. 이런 정교한 연결 패턴이 기억 형성과 새 정보 학습에 유리하다는 게 연구진의 결론이야(출처: Frontiers in Psychology).

아이들 실험은 더 생활에 가까워.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4주 동안 하루 1시간씩 책을 필사했더니 글씨가 눈에 띄게 반듯해진 것은 물론, 10분을 못 버티던 아이가 30분 동안 자리를 지키며 쓰게 됐어. 악필인데 효과가 있겠냐고 걱정할 수도 있는데, 글씨 모양은 조건이 아니었어. 이해하면서 정확하게 쓰는 태도가 핵심이고, 이 실험에서는 아이들 글씨가 오히려 쓰다 보니 반듯해졌어. 악필은 출발점일 뿐 장애물이 되지는 않아. 자기효능감, 그러니까 과제를 끝까지 해낼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는 힘을 재는 검사에서도 수업 집중 항목이 2점 이상 오른 학생들이 나왔고 4점에서 9점까지 뛴 아이도 있었어. 잡생각 없이 쓰기만 했다는 아이의 말이 제일 인상 깊었어.

 

그래서 독서법을 뜯어고치는 대신 작은 장치 하나를 붙였어. 읽다가 마음에 걸리는 문장이 나오면 밑줄을 긋고, 여백에 그때 떠오른 생각이나 감정을 짧게 적는 거야. 몇 줄 안 되는 낙서 같은 기록인데 신기하게도 눈으로만 읽을 때보다 내용이 훨씬 오래 남았어.

그러다 보니 책을 대하는 방식도 바뀌었어. 요즘은 빌려 읽기보다 웬만하면 돈 주고 사서 마음껏 긋고 적으면서 읽어. 깨끗하게 돌려줘야 하는 책 앞에서는 손이 묶이니까. 지키는 방식은 세 가지뿐이야. 마음에 걸리는 문장에 밑줄 긋고 여백에 생각 한 줄 적기. 하루 독서를 마치면 가장 남는 문장 세 줄만 노트에 손으로 옮겨 적기. 휘갈기며 빨리 쓰는 대신 문장을 이해하면서 정확하게 쓰기. 필사하려면 책 한 권을 다 베껴 써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잡았으면 사흘도 못 갔을 거야. 하루 세 줄, 마음에 남은 문장만 옮기고 생각 한 줄을 붙여. 양이 아니고 멈춰서 생각하는 시간이 목적이라서 이 정도면 충분했어.

한 권을 통째로 베껴 쓰는 거창한 필사는 시작도 못 했을 거야. 중요한 건 손을 움직이는 행위 자체보다 그 문장 앞에서 한 번 더 멈추고 생각하는 시간이라고 봐. 결국 독서는 많이 읽는 경쟁이 아니라 읽은 것을 얼마나 오래 붙잡고 삶에 연결하느냐의 문제였어.

오늘 당장 뭐부터 할 거냐면,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어제 밑줄 그은 문장 하나를 노트에 옮겨 적을 거야. 그리고 그 옆에 왜 이 문장이 걸렸는지 한 줄 적어보려 해. 매일 독서 습관에 쓰는 습관을 하나씩 붙여가는 중이야.

 

이제 책을 몇 권 읽었는지 세지 않아. 대신 이번 주에 손으로 옮겨 적은 문장이 몇 개인지 세. 앞의 숫자는 쌓여도 사라졌지만 뒤의 숫자는 며칠이 지나도 머릿속에 남아 있었어.

오늘 읽은 것 중에 마음에 걸린 문장이 있다면 딱 한 줄만 손으로 옮겨보길 바라. 펜과 종이만 있으면 지금 바로 되는 일이야.

세 줄 옮겨 적은 나로부터.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14pwdTdG4H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