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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6일 토요일. 오늘은 서랍 정리를 하다가 이 글을 씁니다.

 

 

아침에 서랍을 열었다가 또 한 번 놀랐습니다. 분명히 한 달 전에 비웠던 자리인데, 신기하게 종이가방과 소스 유리병, 화장품 샘플이 또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다 그럴듯한 이유로 남겨뒀지만 정작 한 번도 다시 꺼낸 적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유난히 게으르거나 미련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낮에 찾아본 자료를 보니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뇌가 원래 그렇게 설계되어 있는 문제였습니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 연구팀은 사람들에게 머그컵을 공짜로 나눠주고, 컵을 받은 사람에게는 얼마면 팔겠느냐고,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얼마면 사겠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뚜렷했습니다. 컵을 가진 사람은 갖지 않은 사람이 부른 값의 거의 두 배를 불렀습니다(출처: Kahneman, Knetsch & Thaler,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똑같은 컵인데도 내 것이 되는 순간 가치가 부풀어 오르는 이 현상을 소유효과라고 부른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여기에 사람은 얻는 기쁨보다 잃는 아픔을 훨씬 크게 느끼는 손실회피 성향까지 겹치면, 이미 내 것이 된 물건을 버리는 일이 유독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가 설명됩니다. 저도 예전부터 돈을 주고 산 물건일수록 버리는 순간 괜히 손해를 보는 것 같아 다시 서랍 속으로 넣어두곤 했습니다. 미련해서가 아니라 소유효과와 손실회피가 동시에 작동한 결과였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게 됐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계속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물건을 붙잡을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언젠가 쓰겠지"인데, 이 언젠가의 정체를 들여다보면 실은 이미 써버려서 되돌릴 수 없는 돈이나 시간이 아까운 마음, 그리고 아직 오지도 않은 후회를 미리 당겨와 걱정하는 마음이 함께 작용한 결과에 가깝습니다. 경제학에서는 이미 지출해 되돌릴 수 없는 비용을 매몰비용이라 부르는데, 물건을 사느라 쓴 돈은 계속 갖고 있든 버리든 이미 제 손을 떠난 돈입니다. 그런데도 그 돌아오지 않을 돈이 아까워서, 정작 지금 쓰지도 않는 물건에게 소중한 공간을 계속 내주고 있었던 셈입니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다는 걸 깨닫고 나니,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게 아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제 공간과 마음을 그 물건이 차지하고 있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후엔 정리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왜 이렇게 집이 늘 피곤하게 느껴졌는지도 찾아봤습니다. 프린스턴대학교 신경과학연구소 연구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여러 물건은 뇌의 시각피질 안에서 서로 신경 반응을 억누르며 주의를 끌기 위해 경쟁한다고 합니다(출처: Journal of Neuroscience, McMains & Kastner). 서랍 안에 물건이 많을수록 뇌는 그 물건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느라 정작 중요한 일에는 에너지를 덜 쓰게 됩니다. 여기에 선택지가 많을수록 오히려 판단이 더 어려워진다는 선택의 역설까지 더해지면, 옷장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결국 늘 입던 옷만 다시 꺼내 입는 이유가 설명됩니다. 게다가 UCLA 연구팀이 가정집을 방문해 조사한 결과, 집을 어수선하다고 표현한 사람일수록 하루 동안의 스트레스 호르몬 변화 패턴이 건강하지 않은 쪽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출처: Saxbe & Repetti,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쌓인 물건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몸은 저것도 치워야 하는데 하고 작게 긴장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편해야 할 집이, 정작 저를 은근히 몰아세우고 있었던 셈입니다.

저녁이 되어서야 다시 서랍을 마주했습니다. 한꺼번에 다 비우려 하지 않고 오늘은 수건 서랍 하나만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처음엔 아까운 마음이 컸지만, 막상 비우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까지 가벼워졌습니다. 정리하면서 스스로에게 몇 가지를 물었습니다. 돈 주고 산 건데 버리면 손해 아닐까? 그 돈은 산 순간 이미 제 손을 떠났다고 답했습니다. 지금 물건을 붙잡고 있든 보내든 그 돈은 돌아오지 않으니, 매몰비용에 더는 공간을 저당잡히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럼 추억이 담긴 물건까지 다 정리해야 할까?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정리는 적게 소유하는 경쟁이 아니라 지금 필요한 걸 가려내는 기준을 세우는 일이니, 의미 있는 물건은 남겨도 괜찮다고 정리했습니다. 정리해도 며칠 지나면 또 서랍을 채우지 않을까? 실제로 그랬던 걸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에 다 비우기보다, 새 물건 하나가 들어오면 안 쓰는 물건 하나를 내보내는 규칙으로 다시 차오르는 걸 막기로 했습니다.

오늘 정리하면서 정한 나름의 원칙은 이렇습니다. 장소가 아니라 물건 종류로 시작할 것(오늘은 수건, 내일은 컵). 새 물건 하나가 들어오면 안 쓰는 물건 하나를 내보낼 것. 최근 2년간 손 한 번 안 간 물건은 딱 세 개만 골라 정리할 것. 바로 버리기 아까우면 나눔 상자에 담아 한동안 지켜볼 것. 다만 비우면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무조건 많이 버리는 것이 좋은 삶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버리는 행동 자체가 아니라, 지금의 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인지 판단하는 기준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밤에 정리를 마치고 나서 오늘 하루를 돌아봅니다. 물건을 비운다는 건 결국 소유효과와 손실회피라는 마음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조금씩 마주하는 연습이었습니다. 정리는 물건을 잃는 일이 아니라, 그 물건에 저당잡혀 있던 공간과 마음의 여유를 도로 찾는 일이었습니다. 내일은 서랍 하나만 더 열어, 최근 2년간 손 한 번 안 간 물건 딱 세 개만 골라볼 생각입니다. 그거면 하루는 충분히 잘한 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XTueIYuM2aY